한국 신화 2. 설문대할망은 왜 물장오리에서 사라졌을까?
제주보다 거대했던 할망이 처음 만난 자신보다 깊은 세계

안녕하세요, 이야기를 모으는 여우 호월입니다.
제주에는 산보다 크고, 섬보다도 거대했다고 전해지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설문대할망.
제주보다도 거대했던 설문대할망은 왜 물장오리에서 사라졌을까요?
※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하나의 원전에 이어지는 신화가 아니라 제주 곳곳에 전해진 여러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주요 이야기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따라가 본 뒤, 각각의 전승 차이는 뒤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제주보다 거대한 존재
설문대할망은 치마에 흙을 담았습니다.
사람이 들 수 있는 정도의 흙이 아니었습니다.
산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흙이었습니다.
할망이 제주 땅을 걸어갑니다.
치마 틈으로 흙이 조금 떨어집니다.
또 걷습니다.
다시 흙덩이가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떨어진 흙이 제주 곳곳에 솟은 오름이 되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대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할망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집니다.
오름은 치마에서 흘린 흙덩이가 되고,
산과 섬은 거대한 다리를 걸칠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한쪽에 발을 딛고,
다른 쪽으로 긴 다리를 뻗습니다.
바다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는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바다가 할망에게는 빨래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뀝니다.
설문대할망에게는,
제주라는 섬 자체가 작았습니다.

거인의 힘으로도 완성되지 않은 길
그렇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설문대할망에게 인간들이 얽힌 이야기도 전합니다.
어느 전승에서 할망은 사람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자신에게 맞는 옷을 만들어준다면 제주와 다른 땅 사이에 길이나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망의 몸에 맞는 옷을 만들려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명주나 비단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천을 모았습니다.
하나.
또 하나.
조금씩 필요한 양에 가까워집니다.
거대한 할망의 옷도 이제 거의 완성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아주 조금이 부족했고,
옷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할망이 약속했던 길도 완성되지 않고,
제주는 그대로 바다에 둘러싸인 섬으로 남았습니다.
전승에 따라 필요한 천의 양과 단위는 달라집니다.
백 통이나 백 필, 백 동 같은 숫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다른 수량으로 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결하려던 곳 역시 육지, 진도, 추자도 등 여러 형태로 전해집니다.
제주보다 거대한 존재가 있었고,
제주와 다른 땅을 이어버릴 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는 마지막 한 조각은 거인이 아니라 인간들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조각은 끝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주에서 가장 큰 것은 할망이었다
제주에는 할망이 여러 물의 깊이를 자신의 몸으로 가늠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거대한 몸을 물속에 넣어봅니다.
하지만 깊지 않습니다.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곳에 들어가 봅니다.
역시 할망을 삼키지 못합니다.
또 다른 물을 찾아갑니다.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깊어 보이는 물도 거대한 할망의 몸 앞에서는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설문대할망이 만난 자연은 늘 그녀보다 작았습니다.
그러다 할망은 한곳에 이릅니다.
물장오리.

모든 것보다 컸던 할망
설문대할망은 물장오리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이전과 다를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동안 들어갔던 다른 물처럼,
조금만 내려가면 곧 바닥에 발이 닿을 것처럼 보입니다.
할망은 안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들어갑니다.
그런데 발이 닿지 않습니다.
다시 아래로 내려갑니다.
여전히 바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더 들어갑니다.
그래도 끝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주에서 가장 거대한 것은 설문대할망이었습니다.
산보다 컸고,
섬 사이에 다리를 걸칠 수 있었고,
바다조차 생활공간처럼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할망보다 더 큰 것이 나타났습니다.

처음 만난 자신보다 깊은 세계
물장오리의 물은 계속 아래로 이어집니다.
설문대할망은 이전처럼 바닥에 닿지 못합니다.
조금 더.
그리고 다시 조금 더.
하지만 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할망이 아무리 거대해도 깊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전승에서는 설문대할망이 물장오리에 빠져 죽거나, 그 깊은 물속에서 사라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거인은 사라지고 풍경이 남았다
설문대할망은 물장오리에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주에는 여전히 할망의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녀가 치마에서 흘렸다고 전해지는 흙은 오름이 되어 남고,
발을 디뎠다고 전해지는 장소에는 이야기가 붙습니다.
할망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고,
육지로 이어가려 했다는 길의 흔적을 설명하는 전승도 있습니다.
거대한 할망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갔다고 사람들이 믿었던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풍경을 보며 다시 할망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이야기 속 거인은 사라졌지만, 풍경이 대신 그 이야기를 기억하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의 흐름으로 따라온 이야기들은
정말 처음부터 하나의 ‘설문대할망 신화’였을까요?
설문대할망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설문대할망에게는 오늘날 아주 유명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오백 명의 아들과 거대한 죽 솥 이야기입니다.
널리 알려진 형태에서는 설문대할망에게 오백 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들이 집을 비운 사이 할망은 거대한 솥에서 죽을 끓입니다.
그러다 솥 속으로 빠지고 맙니다.
돌아온 아들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죽을 먹습니다.
그러다 뒤늦게 어머니의 뼈를 발견하고 자신들이 먹은 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습니다.
이후 아들들이 영실의 기암인 오백장군과 연결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워낙 강렬한 이야기라 오늘날에는 설문대할망의 대표적인 결말처럼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오백장군이란?
한라산 영실 일대의 사람이나 장군이 줄지어 선 듯한 기암괴석을 ‘오백장군’ 또는 ‘오백나한’이라고 부릅니다.
이 바위들을 설문대할망의 오백 아들과 연결하는 이야기가 널리 전하지만, 세부 내용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설문대할망이 죽 솥에 빠지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아버지가 죽 솥에 빠지는 등 부모와 사건 구조가 달라집니다. 오백장군 전승이 처음부터 설문대할망 이야기와 하나였는지도 논쟁이 있습니다.
오백장군의 여러 판본과 설문대할망과의 관계는 별도 포스팅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 뒤의 설문대할망
설문대할망에게는 출생에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안정된 생애 서사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제주 곳곳에서 특정 지형과 장소에 붙은 짧은 이야기들이 폭넓게 전해졌고, 설문대할망이라는 거대한 여성 존재가 그 이야기들의 중심에 등장합니다.
이 글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과 같이 나눠볼 수 있습니다.
| 지형 형성형 | 흙을 나르고 한라산·오름 등 제주 지형의 형성을 설명 |
| 거대한 신체 행동형 | 빨래·신체 행동·생활도구 등을 통해 거대한 몸을 강조 |
| 육지 연결·옷형 | 옷을 만들어주면 다른 땅과 연결하겠다는 조건과 실패 |
| 물장오리형 | 자신의 몸과 물의 깊이를 가늠하다 깊은 물에서 죽거나 사라짐 |
| 오백장군형 | 오늘날 설문대할망과 강하게 결합했으나 별개 전승의 결합 가능성이 연구됨 |
다만 이것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편의상의 정리입니다.
학계에서 모든 연구자가 사용하는 하나의 공식 유형분류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앞에서 하나의 감정적 흐름으로 읽은 이야기들이 실제 전승에서는 서로 독립적으로 전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설문대할망은 왜 물장오리에서 사라졌을까?
전승에서 확인되는 범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물장오리 이야기에서 설문대할망은 여러 물에 들어가 자신의 키나 물의 깊이를 가늠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거대한 몸 때문에 물이 충분히 깊지 않았지만, 물장오리에서는 끝내 바닥을 가늠하지 못하고 빠져 죽거나 사라졌다고 전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도 하나의 형태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전승에서는 설문대할망이 스스로 여러 물의 깊이를 시험하다가 물장오리에서 죽습니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사람들이 거대한 할망의 호승심을 부추기거나 깊은 물에 들어가 보도록 유도하고,
그 말을 받아들인 할망이 물장오리에 들어갔다가 빠졌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설문대할망의 죽음을 단순히 ‘아무 이유 없이 깊이를 재다 죽었다’고만 정리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판본에 따라서는 사람들의 부추김과 할망의 호승심이 죽음에 이르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전승에 공통된 ‘오만에 대한 처벌’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개입 없이 여러 물의 깊이를 시험하다 물장오리에서 죽는 형태도 함께 전하기 때문입니다.
설문대할망은 정말 제주를 만든 창조여신이었을까?
설문대할망을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창조여신’
이 표현이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설문대할망이 흙을 나르고 한라산과 오름을 비롯한 제주 지형을 만들거나 변화시켰다는 전승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또 여러 연구에서는 이런 거대한 여성 존재의 배후에 여성 창세신이나 산신적 성격이 있었을 가능성을 논의해 왔습니다.
연구자들의 해석
기존 연구에서는 설문대할망이 본래 여성 창세신이나 창조신적 존재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성성이 약해져 거인설화와 민담의 인물로 변화했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최근 연구에서는 이러한 창조여신설의 근거를 다시 검토하며 조금 더 신중한 입장을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쟁점 가운데 하나가 1771년 장한철의 『표해록』입니다.
이 문헌에는 오늘날의 ‘설문대할망’이라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한라산과 관계된 선마선파·선마고라는 존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설문대할망의 이른 기록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지만, 같은 존재인지에는 논쟁이 있습니다.
설문대할망 또는 그와 관계된 여성신격의 신앙 흔적을 검토하는 연구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현재 자료만으로 고대 제주에 하나의 완성된 설문대할망 창조신앙 체계가 있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설문대할망을 제주를 만든 창조여신으로 보는 해석은 오래전부터 존재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고대 제주에 하나의 완성된 설문대할망 창세신화가 있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제주 곳곳의 산과 오름, 바다와 바위를 거대한 여성의 행동으로 설명하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다는 사실입니다.
‘할망’이라고 해서 늙은 할머니였을까?
이름에서도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할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나이 많은 할머니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제주 신명에서 할망은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늙은 여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성 신격을 높여 부르는 호칭으로도 사용됩니다.
삼승할망과 같은 신명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따라서 ‘설문대할망’이라는 이름만 보고 “늙은 거인 할머니였다.”고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 자체도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문대할망, 설명두할망, 세명주할망 등 여러 형태가 채록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름의 ‘대’를 한자 大로 풀이하는 연구도 있지만 이것이 확정된 어원은 아닙니다.
설문대할망의 이름 문제만 해도 별도의 글 한 편이 필요할 만큼 복잡합니다.
다른 신화와 비교해 보면
북유럽 신화의 이미르도 거대한 존재와 세계 형성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설문대할망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르는 신들에게 죽은 뒤 자신의 몸이 세계를 이루는 재료가 됩니다.
반면 설문대할망의 대표적인 지형 형성담에서는 살아 있는 거인이 직접 흙을 나르고 산과 오름을 만듭니다.
즉, 죽은 몸이 세계의 재료가 되는 거인과, 살아서 지형을 만드는 거인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둘 모두 거대한 존재를 통해 세계의 모습을 설명하지만, 이것만으로 같은 기원이나 직접적인 전파 관계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고나 마고할미 등 다른 거인 전승과의 비교는 별도의 글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만한 주제입니다.
풍경은 어떻게 전설을 기억할까?
설문대할망 이야기가 제주에서 특히 강하게 남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풍경 자체가 이야기의 기억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저 오름은 저렇게 솟았을까?
왜 저 바위는 저곳에 놓여 있을까?
왜 해안의 모습은 저렇게 이어질까?
사람들은 그 질문에 이야기를 붙였습니다.
할망이 흙을 흘렸다.
할망이 가지고 놀던 돌이다.
할망이 사용하던 물건의 흔적이다.
할망이 다른 땅으로 길을 놓으려다 남긴 자리다.
그러고 나면 풍경은 더 이상 단순한 풍경이 아닙니다.
오름을 보는 순간 이야기가 떠오르고,
바위를 보는 순간 거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납니다.
실제로 설문대할망 전승은 긴 장편 신화보다는 특정 장소와 결부된 짧은 이야기 형태로 널리 전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제주라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설화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책장을 넘기는 대신 오름을 보고,
문장을 읽는 대신 바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동안 그 풍경에는 계속 설문대할망이 남습니다.
물장오리에서 거인은 사라졌지만, 제주의 산과 오름과 바다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설문대할망이 가장 오래 살아남은 장소는 한 권의 책 속이 아니라,
제주라는 풍경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참고 자료
1차·전승 자료
- 장한철, 『표해록』, 1771
※ 선마선파·선마고 기록. 설문대할망과 동일한 존재인지에는 논쟁이 있음. - 이원조, 『탐라지초본』 계열
- 진성기, 『제주도설화집』
- 현용준, 『제주도전설』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구비문학대계』 제주도편
- 김영돈·현용준·현길언, 『제주설화집성』
- 제주 지역 설문대할망 관련 구전 채록 자료
주요 연구 및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설문대할망 설화」
- 임동권, 「선문대할망설화고」, 1964
- 조현설, 「마고할미, 개양할미, 설문대할망」, 2009
- 김순자, 「‘선문대할망’과 그 別稱」, 『탐라문화』 37, 2010
- 박종성, 「비교신화의 관점에서 본 설문대할망」, 2010
- 현승환, 「설문대할망 설화 재고―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 설화를 중심으로」, 2012
- 허남춘, 설문대할망과 여성신화 관련 연구
- 정진희, 「설문대 할망 창조 여신설 검토」, 『제주도연구』 51, 2019
- 김선자, 「중국 소수민족 창세여신과 설문대할망의 원형」, 『한국무속학』 47, 2023
- 김현수, 「오백장군 이야기에서 나타난 설문대할망의 신화적 성격」, 『한국무속학』 47, 2023
- 류진옥, 「설문대할망 신앙 고찰: 표선리 당캐할망당 전승을 중심으로」, 『한국무속학』 47,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