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화 외전 1. 수명장자는 왜 천지왕의 벌을 받았을까? | 천지왕본풀이 속 또 다른 이야기
수명장자(Sumyeong-jangja)는 제주 무속신화 「천지왕본풀이(Cheonjiwangbonpuri / 天地王本解〈ポンプリ〉)」에 등장하는 부자입니다. 어느 날 그는 가난한 총명부인에게 쌀 한 되를 빌려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안녕하세요, 이야기를 모으는 여우 호월입니다.
이번에는 대별왕과 소별왕이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천지왕본풀이」 속에서 천지왕이 인간 세상의 부정과 마주하는 이야기.
수명장자 징치담입니다.
※ 「수명장자 징치담」은 「천지왕본풀이」의 이본에 따라 악행과 벌의 내용이 크게 달라집니다. 이번 본편은 현용준 『제주도무속자료사전』에 수록된 정주병 구연 「천지왕본풀이」를 중심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일부 대화와 장면 연결은 읽기 쉽게 현대어로 다듬었습니다.
천지왕이 찾아왔지만 쌀이 없었다
천상의 왕 천지왕이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그가 찾아간 곳에는 총명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총명부인의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천지왕을 맞았으니 밥이라도 지어 올리고 싶었습니다.
총명부인은 곡식을 살폈지만, 저녁밥을 지을 쌀조차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한 동네에는 넉넉하게 사는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수명장자였습니다.
총명부인은 그에게 쌀 한 되를 빌리러 갔습니다.
수명장자가 내어준 쌀 한 되
수명장자는 쌀에 흰 모래를 섞어 한 되를 채워, 총명부인에게 건넸습니다.
가난해서 쌀을 빌리러 찾아온 사람에게 그는 온전한 곡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총명부인은 그 쌀을 가지고 돌아와, 밥을 짓기 위해 물을 받았습니다.

아홉 번, 열 번 씻어도
물을 붓고 쌀을 씻었습니다.
한 번.
두 번.
탁해진 물을 버리고 다시 물을 받았습니다.
또 씻었습니다.
그래도 쌀 사이에는 모래가 남았습니다.
정주병 계통에서는 총명부인이 쌀을 아홉 번, 열 번 씻었다고 전합니다.
씻고,
물을 버리고,
다시 씻었습니다.
그만큼 씻었는데도 모래를 완전히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지왕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총명부인은 그렇게 씻은 쌀로 밥을 지었습니다.
마침내 밥상이 천지왕 앞에 놓였습니다.

첫 숟가락
천지왕이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 술 떠 입에 넣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딱.
입 안에서 단단한 것이 씹혔습니다.
모래였습니다.
천지왕이 총명부인을 바라보았습니다.
“첫 숟가락부터 어째서 모래가 씹히는 것이오?”
총명부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습니다.
먹을 쌀이 없어 수명장자에게 한 되를 빌리러 갔다는 것.
그런데 수명장자가 쌀에 흰 모래를 섞어 주었다는 것.
그래서 아홉 번, 열 번 씻었지만 모래가 모두 빠지지 않았다는 것.
천지왕은 자신의 밥에 모래가 들어간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총명부인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명장자가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수명장자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다
수명장자는 많은 곡식을 가진 장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를 이용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부당한 곡식 거래로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곡식을 빌려줄 때 온전한 곡식을 주지 않았고, 가진 것을 이용해 가난한 사람을 착취했습니다.
그 집안의 행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명장자의 딸들은 일꾼들에게 일을 시켰습니다.
자신들은 좋은 장을 먹으면서, 일을 한 사람들에게는 썩은 장을 주었다고 전합니다.
아들들의 행실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소에게 물을 먹이는 일을 맡고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고, 물을 먹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사람에게도.
일꾼에게도.
짐승에게도.
수명장자 집안의 횡포는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총명부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그들의 행실을 천지왕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첫 숟가락에 씹힌 모래 한 알.
그것은 수명장자 집안의 악행이 천지왕 앞에 드러나는 첫 단서였습니다.

천지왕이 신장들을 부르다
천지왕은 총명부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알게 된 것은 자신에게 올린 밥 한 그릇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곡식으로 속이는 일.
일꾼을 함부로 대하는 일.
마소까지 제대로 돌보지 않는 일.
한 집안에서 이어져 온 악행이었습니다.
천지왕은 먼저 벼락을 맡은 벼락장군과 벼락사자를 불렀습니다.
이어 우레를 맡은 우레장군과 우레사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화덕진군까지 불러냈습니다.
수명장자의 집으로 신벌이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화덕진군은 누구일까?
화덕진군은 불과 관련된 신격입니다.
정주병 구연에서는 벼락과 우레의 신격들과 함께 수명장자 집안을 징치하는 데 동원됩니다.

벼락과 우레, 그리고 불
하늘이 울리고, 우레가 터졌습니다.
이어 벼락이 수명장자의 집안을 덮치며 불길이 일었습니다.
그 집안은 한순간에 몰락합니다.
이것은 수명장자 개인에게 가벼운 경고를 내리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천지왕은 총명부인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수명장자 집안의 악행을 집안 전체에 대한 징치로 끝냅니다.

팥벌레가 된 딸, 솔개가 된 아들
벌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정주병본에서는 수명장자의 딸들이 팥벌레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아들들은 솔개가 되었습니다.
이 기묘한 결말은 모든 「천지왕본풀이」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정주병 구연에서 특히 확인되는 징치의 모습입니다.
사람과 일꾼을 함부로 대했던 집안.
마소까지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집안.
그 집안은 결국 이전의 모습으로 남지 못했습니다.
왜 하필 팥벌레와 솔개가 되었을까?
정주병본은 수명장자의 딸들이 팥벌레가 되고, 아들들이 솔개가 되었다고 전하지만 왜 하필 팥벌레와 솔개인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곡식을 이용해 사람을 착취한 집안의 딸들이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벌레가 되고, 아들들이 맹금류인 솔개가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지위를 잃고 다른 존재로 격하되는 징벌로 읽어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전승이 직접 설명한 이유가 아니라 하나의 해석입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수명장자의 집안에 내려진 징치가 끝나고,
천지왕과 총명부인은 부부의 인연을 맺습니다.
천지왕은 훗날 태어날 두 아들의 이름도 일러둡니다.
큰아들은 대별왕.
작은아들은 소별왕.
바로 「천지왕본풀이」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두 형제입니다.
두 형제가 훗날 어떻게 이승과 저승을 나누어 맡게 되었는지는 이전 글 「천지왕본풀이」에서 살펴봤습니다.
이야기 뒤의 수명장자
수명장자 이야기는 하나가 아니다
앞에서 읽은 이야기는 정주병 구연 「천지왕본풀이」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수명장자는 여러 「천지왕본풀이」 이본에 등장하지만,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어떤 벌을 받는지는 놀랄 만큼 크게 달라집니다.
| 이본 | 주요 악행 | 징치 | 결과 |
| 정주병본 | 부정한 곡식 거래, 가난한 사람 착취, 자식들의 일꾼·가축 학대 | 벼락·우레·불 | 집안 파멸, 딸은 팥벌레·아들은 솔개 |
| 이무생본 | 불효와 제사 소홀 | 흉험·쇠철망 | 완전한 징치에 실패 |
| 문정봉본 | 불효·조상 제사 문제 | 조화·불·바람 | 수명장자가 개과천선 |
| 박봉춘본 | 행패와 천지왕에 대한 도전 | 천지왕의 시도 뒤 소별왕이 최종 징치 | 모기·파리·빈대·각다귀 등으로 변함 |
문정봉본에서는 수명장자가 살아남아 잘못을 뉘우치지만, 정주병본에서는 집안 자체가 파멸합니다.
같은 ‘수명장자’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이야기는 이렇게 달라집니다.
수명장자는 왜 천지왕의 벌을 받았을까?
수명장자는 천지왕의 밥에 모래가 들어가게 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벌받은 것이 아닙니다.
정주병본에서 그는 곡식을 가진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부자로 묘사됩니다.
총명부인에게도 온전한 쌀이 아니라 흰 모래를 섞은 쌀을 내주었습니다.
그의 딸들은 가난한 일꾼을 푸대접했고, 아들들은 마소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수명장자 한 사람의 일회적인 장난이 아니라 집안 전체에 반복되는 부당한 행위가 묘사되는 것입니다.
천지왕이 첫 숟가락에서 모래를 씹은 사건은 그 모든 악행의 원인이 아니라,
그 악행이 천지왕에게 드러나는 계기였습니다.
인간 세계의 잘못된 질서를 먼저 제거하다
여기부터는 전승 자체의 사건과 연구자들의 해석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승에서 확인되는 사실
수명장자 집안은 인간 세계에서 여러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고,
천지왕은 총명부인의 말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벼락·우레·불을 관장하는 신격을 보내 집안을 징치합니다.
그 뒤 천지왕과 총명부인의 결연이 이루어집니다.
연구자들의 해석
수명장자 징치담을 연구한 학자들은 이 장면을 단순한 ‘나쁜 부자 응징’보다 넓은 창세 질서의 문제와 연결해 읽기도 합니다.
아직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인간 세계에는 부당한 질서가 존재하고,
천지왕은 그 가운데 수명장자로 대표되는 악한 질서를 제거합니다.
그리고 그 뒤 총명부인과 결연해, 장차 세계의 질서를 맡게 될 대별왕과 소별왕의 탄생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악한 질서의 제거 → 천지왕과 총명부인의 결연 → 대별왕·소별왕의 탄생이라는 흐름입니다.
강소전의 연구에서는 수명장자를 천지왕과 총명부인의 순조로운 결합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관점에서도 해석합니다.
부자라서 벌받은 것은 아니다
정주병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부 자체보다 부를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수명장자는 곡식을 빌려주는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을 속이고, 일한 사람을 정당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가축을 돌봐야 할 책임도 저버립니다.
즉 이 이야기에서 비판받는 것은 가진 사람이 자신의 부와 힘을 이용해 약한 사람을 착취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수명장자는 현대적인 의미의 특정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제주 신화 속 전형적인 악한 인물입니다.
쇠철망은 어디에서 나올까?
수명장자 이야기에서 머리에 쇠철망을 씌우는 장면을 접한 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번 본편의 중심인 정주병본의 대표 징치 방식이 아닙니다.
쇠철망 징치는 주로 이무생본·박봉춘 계통에서 나타납니다.
정주병본의 징치는 벼락·우레·불이 중심입니다.
불에 탄 수명장자의 집과 불찍굿
정주병본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더 이어지는데,
이 사건은 제주 무속의 불찍굿이 왜 마련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쉽게 말하면, “불로 죽은 존재들과 불을 다루는 신격을 달래고 대접하기 위해 이런 굿을 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신화가 의례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명장자 징치담은 단순한 악인 응징 이야기가 아니라, 제주 무속의 특정 굿이 왜 존재하는지까지 설명하는 신화적 유래담의 역할도 합니다. 다만 불찍굿 자체의 절차와 화덕 신격의 성격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여기까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천지왕본풀이」로
수명장자 이야기는 대별왕과 소별왕의 모험보다 앞선 세대의 사건입니다.
수명장자 집안의 징치가 끝난 뒤 천지왕과 총명부인은 인연을 맺습니다.
그리고 훗날 두 아들이 태어납니다.
대별왕과 소별왕.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 포스팅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관련 글: 한국 신화 3. 천지왕본풀이 | 대별왕과 소별왕은 왜 이승과 저승의 왕이 되었을까?
참고 자료
1차 채록 자료
- 현용준, 『제주도무속자료사전』, 정주병 구연 「천지왕본풀이」
주요 연구
- 권태효, 「제주도 수명장자 징치담의 자료 양상과 신화적 성격」, 『민족문화연구』 77, 2017, pp.33–65.
- 「천지왕본풀이의 전승 양상 및 교육적 활용에 관한 연구」
- 강소전, 「〈천지왕본풀이〉의 의례적 기능과 신화적 의미」
- 전주희, 제주 초감제 신화의 악 관련 연구
기관·전문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지왕본풀이」
- 국립중앙도서관 제주어 관련 정주병 구송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