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신화와 전설

북유럽 신화 1. 세계는 불과 얼음 사이에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신화기담 호월 2026. 8. 21. 11:36

신들보다 먼저 태어난 존재, 최초의 거인 이미르

 

안녕하세요, 이야기를 모으는 여우 호월입니다.

신들이 등장하기도 전, 북유럽 신화의 세계에서는 대체 어떻게 생명이 시작된 것일까요?

 

※ 북유럽의 창세 이야기는 하나의 완성된 고대 경전에 일관된 형태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이번 글의 이야기 본편은 스노리 스투를루손의 『산문 에다』 「길피의 속임수」에 전해지는 연속적인 창세 서사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고 에다』의 「무녀의 예언」과 「바프스루드니르의 말」에 남은 더 오래된 시가 전승을 함께 참고했습니다.

 

두 자료의 차이는 이야기 뒤 해설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아직 세계가 없던 때

아주 오래전.

지금의 세상을 이루는 것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공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생겨나기 전, 무엇인가가 벌어져 있었습니다.

고대 북유럽의 시는 그것을 긴눙가가프(Ginnungagap)라고 전합니다.

 

거대한 간극.

아직 땅도 하늘도 아닌, 세계가 형성되기 전 벌어져 있던 공간이었습니다.

 

긴눙가가프는 신이 아니었고,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는 의지를 가진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직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 모든 것 사이에 벌어져 있던 거대한 틈이었습니다.

잠깐, 긴눙가가프는 정말 ‘혼돈’이었을까?
긴눙가가프는 흔히 “북유럽 신화의 혼돈”이라고 소개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조금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긴눙가가프는 신도, ‘혼돈’을 다스리는 신격도 아닙니다.

세계가 형성되기 전 벌어져 있던 거대한 간극이나 심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카오스(Chaos) 역시 현대적인 의미의 ‘무질서’보다는 벌어진 틈이나 간극과 관련된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두 개념을 비교해 볼 수는 있지만, 카오스와 긴눙가가프가 같은 존재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북쪽의 냉기와 남쪽의 불

스노리의 『산문 에다』는 이 오래된 창세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긴눙가가프의 북쪽에는 니플헤임이 있었습니다.

안개와 냉기, 얼음이 지배하는 차가운 영역이었습니다.

그곳에는 흐베르겔미르라는 샘이 있었고, 그 샘에서 수많은 강이 흘러나왔습니다.

흐르는 물은 멀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추워, 강을 따라 흘러온 물질은 굳어 얼음이 되었고,

그 위에는 다시 서리가 내려앉으며 다시 얼음이 쌓이길 몇 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냉기는 조금씩 긴눙가가프 안쪽으로 밀려들었습니다.

 

반대편은 전혀 달랐습니다.

남쪽에는 무스펠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뜨거운 열기와 불꽃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빛나는 불티가 어둠 속을 날아 긴눙가가프 쪽으로 흘러들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차가운 서리가 밀려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다가오며,

 

그리고 마침내 두 힘의 경계가 가까워졌습니다.


불과 얼음의 경계에서

 

긴눙가가프의 남쪽에서 날아온 열기와 불꽃이 북쪽에서 밀려온 한기가 닿는 곳에서는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얼어 있던 서리가 따뜻해져, 조금씩 녹기 시작했습니다.

차갑게 굳어 있던 얼음 위로 물방울이 맺혔습니다.

 

한 방울.

그리고 또 한 방울.

 

오늘날 흔히 북유럽 창세를 두고

“불과 얼음이 충돌했다.”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경계에서 떨어진 방울 속에서 생명이 자라나 하나의 형상을 갖추었고,

마침내 사람과 비슷한 형상의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미르(Ymir)였습니다.

이미르는 훗날 수많은 거인으로 이어지는 원초적인 존재였습니다.

잠깐, 이미르는 신일까 거인일까?
스노리의 『산문 에다』에서는 이미르가 신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요툰(jötunn, 흔히 ‘거인’으로 번역되는 존재) 계통의 원초적 존재입니다.

북유럽 신화의 요툰들은 신들과 싸우기도 하지만, 혼인하고 혈통을 나누기도 합니다.
따라서 ‘거인’은 편리한 관용 번역이지만 그 존재들의 성격 전체를 담아내는 말은 아닙니다.
이미르는 이 거인 계통의 가장 오래된 선조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혼자였던 이미르

이미르에게는 짝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몸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생겨났습니다.

『고 에다』의 「바프스루드니르의 말」에서는 원초적 거인 아우르겔미르(이미르)에게 어떻게 자손이 생겼는지를 기묘하게 전합니다.

 

그가 잠들었을 때였습니다.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한쪽 발과 다른 쪽 발 사이에서도 새로운 존재가 생겨났습니다.

그곳에서는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아들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미르에게서 거인들의 계보가 시작되었습니다.


거대한 암소 아우둠라

하지만 이미르만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서리가 녹아내리던 원초적인 세계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암소였습니다.

 

그 이름은 아우둠라(Auðhumla).

아우둠라의 몸에서는 네 줄기의 젖이 흘러 나왔고, 이미르는 그 젖을 마셨습니다.

 

아직 우리가 아는 삶의 터전조차 마련되지 않은 원초적인 세계에서,

이미르를 먹여 살린 것은 신도, 마법의 열매도 아니었습니다.

한 마리의 신비한 암소였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남습니다.

이미르는 아우둠라의 젖을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우둠라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요?

잠깐, 아우둠라는 『고 에다』에도 나올까?
현존하는 『고 에다』 시가에서는 아우둠라의 창세 이야기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미르와 연결되는 아우르겔미르의 기원, 엘리바가르, 자기생식 같은 내용은 「바프스루드니르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둠라가 나타나고, 네 줄기의 젖으로 이미르를 먹이며, 소금기 있는 얼음을 핥고, 그 안에서 부리가 사흘에 걸쳐 모습을 드러내는 이야기는 현존 자료에서는 스노리의 『산문 에다』가 핵심 자료입니다.

따라서 아우둠라는 모든 오래된 북유럽 창세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얼음을 핥는 암소

아우둠라가 먹은 것은 풀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주변에 놓인 소금기 있는 서리돌을 핥았습니다.

 

첫째 날.

아우둠라는 얼어붙은 돌을 계속 핥았습니다.

얼음이 조금씩 깎여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얼음 속에서 무언가가 드러났습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우둠라는 다시 같은 돌을 핥았습니다.

얼음이 더 벗겨졌습니다.

이번에는 머리카락 아래에서 사람의 머리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몸은 얼음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셋째 날.

아우둠라는 다시 얼음을 핥았습니다.

마침내 남아 있던 얼음이 벗겨지면서 한 남자의 모습 전체가 드러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부리(Búri)였습니다.

 

아우둠라가 그를 새롭게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우둠라가 얼음을 핥자, 그 속에서 부리가 하루하루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르와는 또 다른 계보의 시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우둠라는 북유럽 창세신화에서 가장 독특하고 기억에 남는 존재입니다.

우선, 아우둠라가 왜 하필 암소인지 원전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와 젖이 생존과 재산, 풍요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북유럽 사회를 생각하면, 창세의 한복판에 ‘생명을 먹여 살리는 암소’가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당시의 생활환경과 상징체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우둠라는 직접 세계를 만들거나 신들을 낳는 존재는 아니지만,
이미르에게는 젖을 주어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고,
얼음을 핥아 부리가 모습을 드러내게 하면서 신들의 계보가 시작되는 계기를 만듭니다.

그래서 아우둠라는 거인과 신, 두 계보의 시작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자 같은 존재로 볼 수 있습니다.


부리에게서 이어진 또 하나의 혈통

부리에게서는 보르(Borr)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보르는 한 여인과 결합했는데, 그녀의 이름은 베스틀라(Bestla)입니다.

 

그녀는 거인 볼소른(Bölþorn)의 딸이었습니다.

 

부리에게서 시작된 계보와 이미르에게서 이어진 거인들의 계보.

처음만 보면 서로 다른 두 혈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두 계보는 여기에서 하나로 이어져 보르와 베스틀라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오딘.

빌리.

베.

훗날 북유럽 신화의 세계를 뒤바꿀 세 형제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단순한

신과 거인의 대립이라는 구도에 균열이 생깁니다.

 

오딘에게도 거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잠깐, 그렇다면 거인이 신보다 먼저 태어났을까?
『산문 에다』의 창세 순서를 기준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이미르가 먼저 나타나고, 그 뒤에 아우둠라가 얼음을 핥으면서 부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거인 계통의 원초적 존재가 오딘으로 이어지는 신들의 선조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이 점은 북유럽 신화에서 거인을 단순히 나중에 나타난 ‘악의 종족’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야기 뒤의 북유럽 창세신화

지금까지 읽은 이야기를 하나의 오래된 북유럽 경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적힌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조금 곤란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북유럽 창세신화는 서로 다른 시기와 성격을 가진 자료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두 자료군이 『고 에다』와 『산문 에다』입니다.


『고 에다』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고 에다』는 여러 고대 노르드어 시가를 모아 전하는 자료입니다.

현존하는 핵심 사본은 13세기에 기록되었지만, 그 안에 실린 시들은 그보다 오래된 시가·구전 전통을 포함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번 이야기와 특히 관련 깊은 작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 「무녀의 예언」 Vǫluspá
  • 「바프스루드니르의 말」 Vafþrúðnismál

「무녀의 예언」에서는 아직 땅과 하늘, 바다와 풀 등이 없던 세계의 초기 상태가 매우 압축적으로 묘사됩니다.

또한 이미르와 세계 이전의 간극을 연상시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프스루드니르의 말」에서는 엘리바가르에서 나온 독성 방울과 아우르겔미르(이미르)의 기원, 그리고 그에게서 생명이 이어지는 자기생식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시가들은 우리가 앞에서 읽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창세 서사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산문 에다』에서 이야기는 훨씬 구체적이 된다

13세기 아이슬란드의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정리한 『산문 에다』의 「길피의 속임수」에서는 창세 이야기가 훨씬 체계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곳에서는,

니플헤임무스펠긴눙가가프얼음과 서리남쪽의 열기이미르아우둠라부리보르와 베스틀라오딘·빌리·베

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훨씬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오늘날 대중적으로 가장 익숙한 북유럽 창세신화의 모습은 이 스노리의 서술에 크게 기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노리의 『산문 에다』를 곧바로 “바이킹 시대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믿었던 단 하나의 정본”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스노리는 이전 시가 전승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여러 시를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고 에다』에는 보이지 않고 『산문 에다』에서만 확인되는 요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우둠라와 부리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스노리 자신의 재구성인지, 지금은 사라진 더 오래된 전승을 보존한 것인지는 현재 자료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왜 북유럽 창세에는 ‘암소’가 등장할까?

북유럽 사회에서 소와 젖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생존과 재산, 풍요를 떠받치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르를 젖으로 먹여 살리는 아우둠라는, 당시 사람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였을 ‘생명을 유지시키는 존재’의 이미지와 잘 맞습니다.

 

이 점은 동아시아의 여러 신화와 비교해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동아시아의 농경 사회에서는 창세와 문명의 이야기에서 땅과 산천, 곡식, 농경, 인간 사회의 질서가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주 크게 보면 이런 차이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북유럽 — 암소·젖·가축 → 생명 유지와 풍요
동아시아 — 대지·곡식·농경 → 생존과 사회 질서

 

물론 모든 북유럽 신화를 목축, 모든 동아시아 신화를 농경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가 신화 속 ‘생명을 먹여 살리는 것’의 모습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생각해볼 만합니다.

다음 이야기 — 신들은 왜 이미르를 죽였을까?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미르와 거인들의 계보, 그리고 부리에서 오딘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계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오딘과 빌리, 베는 곧 이미르를 죽입니다.

문제는 현존하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이미르가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오딘 형제들은 왜 이미르를 죽였을까요?

다음 편에서는 이미르의 죽음과, 그의 몸으로 세계가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1차 자료

  • 『고 에다』 Poetic Edda
    • 「무녀의 예언」 Vǫluspá
    • 「바프스루드니르의 말」 Vafþrúðnismál
    • 「그림니르의 말」 Grímnismál
  • Snorri Sturluson, 『산문 에다』 Prose Edda
    • 「길피의 속임수」 Gylfaginning
  • Edward Pettit, The Poetic Edda: A Dual-Language Edition, Open Book Publishers, 2023.
  • Anthony Faulkes ed., Edda: Prologue and Gylfaginning, Viking Society for Northern Research, 2005.

주요 연구 자료

  • Ursula Dronke, The Poetic Edda II: Mythological Poems
  • David Taggart, 「Fate and Cosmogony in Völuspá: Shaping History in a Moment」
  • Hemming Kure, 「Conceptual Thought in the Old Norse Myth of Creation」
  • John Lindow, Norse Mythology: A Guide to the Gods, Heroes, Rituals, and Beliefs
  • Rudolf Simek, Dictionary of Northern Myth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