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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화와 전설

한국 신화 6. 주몽신화 |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주몽은 어떻게 고구려를 세웠을까?

by 신화기담 호월 2026. 9. 17.

주몽신화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어떻게 태어나고, 부여의 기존 질서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고구려 건국신화입니다. 한국 신화(Korean mythology / 韓国神話) 가운데서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주몽(Jumong / 朱蒙・チュモン)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제거될 위기에 놓였지만 결국 부여를 떠나, 고구려(Goguryeo / 高句麗)의 창업군주가 됩니다.

 


안녕하세요, 이야기를 모으는 여우 호월입니다.

알에서 태어난 아이는 훗날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 주몽으로 불리게 됩니다.

알에서 태어난 주몽은 어떻게 부여를 떠나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을까요?

 

 

 

 

 

※ 주몽신화는 하나의 고정된 원전으로만 전하지 않습니다. 이번 이야기 본편은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를 중심 골격으로 삼습니다. 『위서』와 「광개토왕릉비」 등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는 중요한 차이는 이야기 뒤에서 따로 살펴봅니다. 일부 연결 표현은 읽기 쉽게 재구성하되, 서로 다른 판본의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합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삼은 것은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몽의 탄생에서 부여 탈출과 도하,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졸본 정착까지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주몽이 어떻게 건국자가 되는가’를 한 흐름으로 살펴보기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버려졌지만 죽지 않은 알, 주몽의 탄생

『삼국사기』에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Yuhwa / 柳花)는 하백의 딸로 등장합니다.

유화는 해모수와 관계를 맺은 뒤 부모에게 꾸지람을 받고 우발수로 쫓겨나 있었고, 그곳에서 금와에게 발견됩니다.
금와는 유화를 거두어 방 안에 머물게 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햇빛이 유화를 따라 들어왔습니다.

유화가 몸을 피하면 빛도 움직여 다시 그녀를 비추었습니다.

 

얼마 뒤 유화는 아이가 아니라 거대한 알을 낳았는데,
금와는 그 알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개와 돼지에게 주었지만 짐승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길에 버리자 소와 말이 밟지 않고 피해 갔고,

들판에 내다 버리자 새들이 내려와 날개로 알을 덮었습니다.
알을 깨뜨리려 해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금와는 알을 유화에게 돌려주었는데,

유화가 알을 감싸 두자 마침내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잠깐, 우발수는 어디일까?
우발수(優渤水)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가 금와왕에게 발견된 장소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를 만났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태백산과 우발수가 오늘날 정확히 어디인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우발수의 위치를 여러 지역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고대 지명입니다.
한편 주몽이 부여를 탈출한 뒤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건넌 강은 우발수가 아닙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강을 엄사수(淹㴲水)라고 기록하며,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라는 이름이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발수 → 유화가 금와왕에게 발견된 곳.
엄사수·엄리대수 → 주몽이 탈출 과정에서 건넌 물

활을 잘 쏘던 아이는 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까?

아이는 빠르게 자랐습니다.
『삼국사기』는 그가 일곱 살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고,

백발을 쏘면 백발을 모두 맞출 만큼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합니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다고 나옵니다.

 

문제는 뛰어난 재능이었습니다.

금와의 아들들 가운데 맏아들 대소는 주몽을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가 아니라

평범하지 않은 출생에 뛰어난 재능까지 지닌, 왕실의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주몽의 능력은 곧 부여 왕실이 그를 경계하는 이유가 되었고,

금와는 주몽에게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습니다.

 

겉으로 보면 활을 잘 쏘던 청년에게 왕실의 말을 돌보게 한 일에 지나지 않지만,

이곳에서 주몽은 힘과는 다른 능력을 보여줍니다.

주몽이 좋은 말을 일부러 굶긴 이유

주몽은 말들을 살펴보다가 좋은 말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좋은 말을 일부러 굶겨 야위게 만들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웠습니다.
말을 고를 때가 되자 금와는 보기 좋게 살찐 말을 택했고,

초라하게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주몽이 노린 것은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이 일화에서 주몽은 단순히 활을 잘 쏘는 영웅으로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불리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가 무엇을 보고 판단할지를 읽어 상황을 뒤집습니다.

 

이후 사냥에서도 비슷한 일이 이어집니다.

주몽은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적은 화살을 받았지만 더 많은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의 재능이 다시 한 번 두드러지자 왕자들과 신하들은 주몽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먼저 위험을 알아차렸습니다.

유화의 경고와 주몽의 탈출

유화는 아들에게 이곳에 남아 죽음을 기다리지 말고 멀리 떠나 뜻을 이루라 권했습니다.
그리고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부여를 떠났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부여 밖으로 향했으나 탈출은 곧 막혔습니다.
앞에는 큰 강물이 가로놓여 있었고, 뒤에서는 추격병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돌아가면 붙잡힐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건널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몽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요?

주몽과 함께 부여를 떠난 세 사람은 누구였을까?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세 사람과 벗이 되어 함께 길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사람의 출신이나 주몽과 어떤 관계로 만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이와 마리는 건국 이후의 『삼국사기』 기록에도 다시 등장합니다.
오이는 동명성왕 때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공격하고,
이후 유리명왕 때에는 마리와 함께 양맥과 한의 고구려현을 공격한 인물로 기록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사료마다 주몽의 동행자가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와 「동명왕편」 등 한국 측 전승에서는 오이·마리·협보 세 사람이 등장하지만,
중국의 『위서』에는 오인(烏引)·오위(烏違) 두 사람이 주몽과 함께 탈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이 단순한 개인 동료였는지, 실제 여러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일부 연구자는 오이·마리·협보가 주몽과 함께 남하한 여러 집단의 우두머리를,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료에 직접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연구자의 해석입니다.

후대 『제왕운기』에서는 이들을 아예 주몽의 왕업을 함께 도운 세 신하로 그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오이·마리·협보는 주몽의 단순한 여행 동료라기보다,
전승 속에서 부여 탈출부터 새로운 나라를 향한 여정을 함께 시작한 최초의 동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와 자라가 만든 다리

『삼국사기』에서 주몽은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고 밝히며 강물에 도와달라 청합니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주몽이 건널 수 있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주몽과 오이, 마리, 협보는 그 위를 건너 반대편에 도착했습니다.

일행이 모두 건너자, 이어졌던 다리는 다시 흩어져,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더 이상 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광개토왕릉비」의 추모 전승에서는 물고기와 자라가 아니라 갈대와 거북이 도하를 돕습니다.

도망자가 사람을 모으기 시작하다

강을 건넜다고 곧바로 나라가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몽은 남쪽으로 이동해 모둔곡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기운 옷을 입고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재사, 무골, 묵거였는데, 주몽은 세 사람에게 각각 성을 내려주고 능력을 헤아려 일을 맡겼습니다.

 

오이·마리·협보가 함께 탈출한 동료였다면, 재사·무골·묵거는 부여 밖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짧은 장면이지만 여기서 주몽의 역할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활을 잘 쏘고 위기를 빠져나오던 개인 영웅이 이제 사람을 받아들이고 역할을 나누는 리더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둔곡에서 만난 세 사람, 재사·무골·묵거는 누구일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재사(再思)·무골(武骨)·묵거(默居)였는데, 세 사람이 성을 말하지 않자,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내려주었고,
이후 세 사람은 주몽과 함께 졸본으로 향합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이들을 단순히 길에서 우연히 만난 세 사람이 아니라,
주몽 세력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합류한 지역 집단의 수장들을 반영한 존재일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모둔곡과 같은 ‘곡(谷)’ 단위의 여러 공동체가 결합하면서 초기 고구려의 정치집단이 형성되었다는 해석입니다.
다만 이것은 사료에 직접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역사학적인 해석입니다.

또 『위서』에는 주몽이 세 사람을 만났다는 전승은 전하지만 재사·무골·묵거라는 이름이나,
주몽이 성을 내려주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료의 차이를 바탕으로, 원래 ‘주몽이 세 사람을 만났다’는 전승이 후대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인물의 이름과 사성을 받는 이야기가 보다 구체화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재사·무골·묵거는 주몽과 함께 부여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아니라,
탈출 이후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합류한 세 사람입니다.
신화의 흐름으로 보면 주몽의 건국 세력이 점차 커지는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졸본에 도착한 주몽, 고구려를 세우다

주몽 일행은 마침내 졸본천에 이르렀습니다.
주몽은 그곳의 토지가 기름지고 산과 물의 형세가 험고한 것을 보고 도읍할 만한 곳으로 여겼습니다.
궁실을 지을 겨를도 없어, 주몽은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으며 고씨를 칭했습니다.
쫓기던 주몽의 이야기는 그렇게 고구려 건국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졸본천과 비류수는 어디일까?
졸본은 오늘날 대체로 중국 랴오닝성 환런 일대로 추정됩니다.
이곳에는 오녀산성을 비롯해 고구려 초기의 성곽과 고분 유적들이 남아 있어 고구려 초기 중심지였음을 보여줍니다.

비류수는 일반적으로 오늘날 환런 일대를 흐르는 훈장(渾江)으로 보지만, 그 지류인 푸얼강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졸본천은 별개의 큰 강이라기보다 비류수 가운데 졸본 지역을 흐르는 구간을 가리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졸본 → 주몽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 지역.
졸본천 → 졸본 지역을 흐르던 물줄기.
비류수 → 졸본 일대의 주요 강으로, 오늘날 훈장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주몽은 정말 아무도 없는 땅에 나라를 세웠을까?

그렇다고 주몽이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빈 땅에 홀로 나라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삼국사기』에는 이후 비류국의 왕 송양이라는 기존 정치세력이 등장합니다.

또 『삼국사기』 안에는 주몽이 졸본부여 왕의 딸과 혼인하고 왕위를 이었다는 다른 전승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즉 전승에 따라 주몽의 건국은 새로운 터에 기반을 마련하는 모습으로도,

이미 존재하던 세력과 경쟁하거나 결합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납니다.

 

이번 글에서는 주몽이 부여를 떠나 고구려를 세우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송양과의 상세한 경쟁과 그 이후 이야기는 여기서 더 이어가지 않겠습니다.

이야기 뒤의 주몽신화

앞에서 읽은 이야기는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전하는 주몽신화는 한 시대, 한 문헌에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자료마다 주몽의 이름과 출신지, 부모의 계보, 강을 건너는 방법까지 조금씩 다릅니다.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당대의 금석문입니다.

여기서는 시조를 ‘추모왕(鄒牟王)’이라 부르고, 북부여에서 나온 신성한 혈통을 지닌 건국자로 그립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말 사육이나 대소의 위협 같은 긴 성장담보다는 시조의 신성함과 건국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위서』 고구려전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상세한 영웅서사를 전합니다.

알을 없애려 해도 동물들이 해치지 않는 장면, 뛰어난 궁술, 말 사육 책략,

도주와 도하 등 이번 이야기와 겹치는 중요한 사건들이 확인됩니다.

 

『삼국사기』는 이번 본편의 중심 자료입니다.

주몽의 탄생에서 부여 탈출, 도하,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졸본 정착까지 사건이 길게 이어져 있어,

‘주몽이 어떻게 건국자가 되는가’를 한 흐름으로 읽기에 적합합니다.

 

반면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훨씬 크게 확장합니다.

해모수의 강림과 하백과의 변신 대결, 유화와 관련된 여러 신이한 사건이 자세히 나오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장면들을 『삼국사기』 이야기 속에 섞지 않았습니다.

주몽과 추모는 왜 다르게 기록됐을까?

오늘날에는 고구려 시조를 흔히 ‘주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남긴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묘지」 등에는,

시조의 이름이 鄒牟(추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중국의 『위서』 등에서는 朱蒙, 즉 오늘날 우리가 ‘주몽’이라고 읽는 표기가 나타납니다.

이 밖에도 추몽(鄒蒙), 중모(中牟·仲牟), 도모(都慕) 같은 표기가 전해지는데,

이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여러 인물의 이름이라기보다,

같은 고유명사를 서로 다른 한자로 기록한 여러 표기로 이해됩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는데,

‘추모’와 ‘주몽’이라는 소리는 각각 鄒牟와 朱蒙을 오늘날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이 당시 실제로 그 이름을 어떻게 발음했는지까지 그대로 복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동명왕’은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날 주몽은 흔히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도 불립니다.
하지만 현존하는 이른 기록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합니다.

 

후한 시기 왕충이 쓴 『논형』 「길험편」에는 이미 동명(東明)이 부여의 시조로 등장합니다.
3세기에 편찬된 『위략』에도 부여의 동명 전승이 실려 있었으며, 이 내용은 『삼국지』 부여전에 붙은 배송지의 주석을 통해 전합니다.

이후 『후한서』에도 부여의 동명 전승이 기록됩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주몽(朱蒙)이라 하고 왕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정리합니다.

따라서 ‘동명’을 단순히 주몽·추모의 또 다른 음차 표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부여에 먼저 확인되는 동명 시조 전승과 고구려의 주몽·추모 전승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연결되었는지는 별도로 살펴봐야 할 문제이며, 그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고구려 당대 금석문에서는 ‘동명왕’이나 ‘동명성왕’이라는 왕호가 확인되지 않으며,
고구려 당대 자료에서는 대신 ‘추모왕’ 또는 ‘추모성왕’이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동명(東明)은 주몽(朱蒙)·추모(鄒牟)의 단순한 다른 한자 표기로 보기 어렵습니다.
현존하는 이른 기록에서는 먼저 부여의 시조로 나타나며, 후대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왕호인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확인됩니다.

※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고구려 당대 기록에 추모(鄒牟)라는 표기가 남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구려 시조에게는 본래 ‘추모·주몽’ 계통으로 기록된 고유한 이름이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부여의 동명 시조 전승과 결합해 후대에 ‘동명성왕’이라는 왕호로 전해지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은 여러 사료를 살펴본 뒤 제가 개인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학계에서 하나로 확정된 결론은 아닙니다.

북부여일까, 동부여일까?

출신지를 말할 때도 자료가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묘지」에서는 추모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전합니다.

반면 이번 본편의 중심인 『삼국사기』 상세 서사는 동부여를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주몽이 ‘반드시 북부여에서 나왔다’거나 ‘모든 전승에서 동부여 출신이다’라고 정리할 수 없으며,
서로 다른 시대의 기록이 서로 다른 부여 계보를 남겼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는 편이 주몽신화를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쫓겨난 주몽은 어떻게 고구려의 시조가 되었을까?

알은 여러 번 버려졌지만 동물과 새들이 해치지 않았고, 깨뜨리려 해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난 아이는 뛰어난 궁수가 되었지만, 그 재능 때문에 왕실의 경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몽에게는 활솜씨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좋은 말을 일부러 야위게 만들어 자신에게 돌아오게 한 일화처럼,

상대의 판단을 읽고 불리한 상황을 역이용하는 책략도 보여줍니다.

 

위협이 실제 살해 음모로 이어지자 유화가 먼저 위험을 알아차렸고,

주몽은 오이·마리·협보와 함께 부여를 떠났습니다.

 

큰 물 앞에서는 자신의 신성한 핏줄을 밝히며 도움을 청했고,

물고기와 자라가 만든 길을 건너 추격을 끊었습니다.

 

강을 건넌 뒤부터 이야기는 다시 변합니다.

재사·무골·묵거를 만나 사람을 받아들이고 역할을 맡겼으며,

마침내 졸본에 자리를 잡고 고구려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그래서 주몽의 변화는 ‘기이하게 태어난 아이 → 뛰어난 궁수 → 쫓기는 청년 → 동료를 이끄는 탈출자 → 사람을 모으는 창업군주’라는 흐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신성한 탄생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은 뒤 보여준 능력과 책략, 유화의 결단, 함께 떠난 동료들, 경계를 넘는 도하,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여 공동체를 만든 과정이 하나로 이어져 건국신화를 완성합니다.

주몽의 도하와 신성한 혈통은 무엇을 의미할까?

원전에서는 어떻게 전할까?

『삼국사기』에서 주몽은 큰 물 앞에 이르자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라고 밝히며 도움을 청합니다. 
이 표현은 『삼국사기』 본문에 실제로 전하는 말이지만 다른 자료는 같지 않습니다.

『위서』에서는 주몽이 자신을 ‘해의 아들, 하백의 외손’이라고 하고,

「광개토왕릉비」에서는 추모가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가 하백의 딸이라고 말합니다.

「동명왕편」에서는 ‘천제의 손자’라는 표현도 나타납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강을 사이에 두고 주몽의 처지가 달라집니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 그는 부여에서 쫓기는 사람이었지만,

강을 건넌 뒤에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마침내 건국을 이뤄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야기 구조상 주몽이 자신을 위협하던 옛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과 공동체로 넘어가는 경계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원전에 직접 적힌 설명이 아니라 서사의 배치를 통해 가능한 해석입니다.

신성한 혈통은 왜 중요했을까?

주몽의 출생과 도하에는 하늘과 물에 연결된 계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신성한 혈통이 건국자의 특별함과 왕권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장치였을 가능성을 오래 논의해 왔습니다.

또 『주서』 등에는 고구려에서 시조모와 시조를 떠올리게 하는 신묘와 제사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런 자료를 함께 보면 주몽 이야기는 단순히 재미있는 영웅담에 그치지 않고,

고구려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조와 왕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였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를 바라보면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주몽은 하늘과 물로 이어지는 신성한 혈통을 지니고 범상치 않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주몽조차 아무런 시련 없이 홀로 나라를 세우지는 못합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부여를 떠나야 했고, 강을 건너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오이·마리·협보와 함께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세력을 이루어 마침내 새로운 나라를 세웁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신성한 혈통을 지닌 한 영웅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 영웅이 수많은 고난을 넘어 여러 사람과 만나고 힘을 모으면서 비로소 세워진 나라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늘과 물이 선택한 시조, 고난을 이겨낸 영웅, 그리고 그와 함께 새로운 터전으로 나아간 사람들.

주몽신화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작을 바라보았던 자부심과 건국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함께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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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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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국 신화 6. 주몽신화 | 부여를 탈출한 주몽은 어떻게 고구려를 세웠을까?

외전

1. 한국 신화 외전 1. 수명장자는 왜 천지왕의 벌을 받았을까? | 천지왕본풀이 속 또 다른 이야기


관련 검색어

Jumong myth / Jumong / Goguryeo foundation myth / King Dongmyeong / Chumo Goguryeo/ Yuhwa / 朱蒙神話 / 朱蒙 / 高句麗建国神話 / 東明王 / 鄒牟王 / 柳花


참고 자료

1차 자료

「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
『위서』 권100 고구려전
『주서』 권49 고구려전
김부식,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
이규보, 「동명왕편」, 『동국이상국집』 권3
일연, 『삼국유사』 권1 기이 고구려조
비교 자료: 왕충, 『논형』 「길험편」 등 부여 동명 관련 기록

2차 자료

윤성용, 「고구려 建國神話와 祭儀」, 『한국고대사연구』 39, 2005.
김선민, 「高句麗建國神話에 대한 廣開土王陵碑와 中國正史의 비교 연구」, 『동방학지』 134, 2006.
김흥규, 「廣開土王陵碑 이전의 朱蒙 神話 -策略的 영웅들의 행방-」, 『어문논집』 63, 2011.
박기범, 「부여·고구려 건국신화의 계통과 형성과정」, 『동북아역사논총』 34, 2011.
임기환, 「고구려 건국전승의 始祖 出自와 北夫餘, 東夫餘」, 『고구려발해연구』 54, 2016.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